회고

편집자 회고

갈 길 잃은 소보로 2023. 6. 15. 15:39

들어가며

나는 2023년에 10년차가 된 인문사회 분야 단행본 편집자다. 이직을 다섯 번 했다. 지금은 직업 전환을 생각하고 있다. 문득 내가 어떤 편집자였는지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한 일을 적고, 잘한 일과 못한 일을 밝혔다.

한 일

신입 시기 - 교정자 (2012. 3. ~ 2015. 3.)

첫 회사에서는 교정교열을 외주로 내보내지 않고 편집자가 직접 했다. 그래서 원고를 읽고 다듬는 법을 연습할 수 있었다. 1년차에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라는 책을 담당했다. 제목은 마이클 샌델의 책을 직접 겨냥하고 있지만, 실제 내용은 현대 정치철학 입문서인 책이다. 윤문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실컷 경험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국내서와 외서를 비슷하게 맡았다. 외서로 역사가 카를로 M. 치폴라의 책 《시계와 문명》을 담당한 적이 있다. 대가의 책을 맡았다는 생각에 기뻤다. 가장 고생스럽게 작업한 책은 《불평등의 창조》. 1천 쪽이 넘는 책을 네 달 가까이 붙들고 있었다. 고고학 고유명사와 외래어 표기를 찾고 통일하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책을 끝내고 교정교열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사 년차 - 시리즈 편집자 (2016. ~ 2017. 11.)

학습만화 시리즈를 새로 출시하려는 회사에 입사했다. 백 가지 주제를 학습만화 백 권으로 다루겠다는 야심찬 기획이었다. , 열쇠, 상대성이론, 지도, 에티켓 등등. 동료들과 구상하고 논의할 것이 많았다. 전문가에게 원고지 백오십 매 분량의 원고를 의뢰했는데, 편집자가 미리 공부하고 십 매 단위로 개요를 작성했다. 나와 잘 어울리는 일이었다.

육 년차 - 외서 기획을 시작 (2019. 2. ~ 2020. 1.)

오 년차가 될 때까지, 교양서 단행본을 기획한 경험이 없었다. 이 점이 스트레스였다. 편집자로 오래 일하려면 기획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을 좋아하고 성실히 공부한다는 점을 내세워 몇 차례 이직에 성공했지만, 다음에도 성공하기는 어렵겠다고 예상했다.
사오 년차로 일하는 동안 매일 오전 삼십 분씩 영어 원서 한 권을 필사하고 번역했다. 존 H. 아널드의 《역사》였다. 내 번역과 이재만 선생님의 번역을 대조하면서 공부했다. 이 경험을 밑천 삼아 영미권 외서를 기획해보기로 했다. 이때 다니던 회사에서 기획한 책 중 몇 권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지질학자가 시간성에 대해서 쓴 에세이 《TIMEFULNESS》, 앨런 제이콥스의 책 《유혹하는 책 읽기》에서 알게 된 프랜시스 스퍼포드의 책 《THE CHILD THAT BOOKS BUILT》. 스퍼포드의 책을 가지고 쓴 기획안 일부 대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 책과 이야기 속으로 도망치고 위안을 구하는 모든 이들, 이야기가 필요해 읽기를 멈추지 않는 우리 자신. 이 책은 이야기 속으로 도망쳐야 했던 사람, 이야기 속에서 자란 사람이 자신의 여정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책의 주인공(저자)은 서사시의 구조를 따라, “숲” “섬” “도시” “구덩이”를 지나며 이야기 속에서 성장한다.
한 편의 이야기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모든 이들과 대화를 나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내가 읽는 것은, 나에게 무엇이 될까? 스퍼포드는 책과 이야기의 본성을 밝힌다.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를 세계의 고통에서 탈출하도록 허락하는지, 어떻게 말할 수 있는 것의 경계를 옮겨놓는지, 어떻게 상상의 범위를 확장하는지 들려준다.
이 책은 자전적인 회고, 서평, 전기, 여행기에 더해 언어학, 심리학, 비평 이론, 정치학을 넘나들며 장르를 부순다. 이야기가 가진 변형의 힘을 서정적으로 그리면서도,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인간의 본성, 사회, 그 밖의 것을 가르쳐주는지 탐구한다. 《이야기의 집》은 책 속에서 ‘나’를 찾는 사람의 이야기다.

칠 년차 - 외서 기획자 (2020. 3. ~)

회사를 옮기고 외서 기획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매주 뉴욕타임스, 가디언, 월스트리트저널, 뉴스테이츠먼, 이코노미스트, 엔피알, 워싱턴포스트, 파이낸셜타임스의 서평 기사를 읽었다. 삼 년여 동안 외서 기획안 150여 편을 작성하고 14종을 계약했다. 그중 일부를 꼽으면 다음과 같다.
영국 정치학자 율리아 에브너가 쓴 《한낮의 어둠》, 영국 언론인 크리스티나 램이 쓴 《관통당한 몸》, 캐나다의 원예가 대릴 쳉이 쓴 《퇴근하고 식물집사》, 미국의 미디어 연구자 졸리 젠슨이 쓴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쓰기》, 영국의 신경의학자 수잰 오설리번이 쓴 《잠자는 숲속의 소녀들》, 영국의 작가 케이트 서머스케일이 쓴 《공포와 광기에 관한 사전》, 미국 언론인 이얼 프레스가 쓴 《더티 워크》, 미국 철학자 클로이 쿠퍼 존스가 쓴 《EASY BEAUTY》 등.

잘한 일

편집자 모임 '센스의 재구성'

책을 더 잘 만들고 싶은 마음에 베스트셀러를 연구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육 년차가 되었을 때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편집자들을 모아 독서모임을 만들었다. 다음과 같은 글을 에스엔에스에 올렸다.

한 달에 한 권씩 인문사회 분야를 중심으로 베스트셀러를 읽습니다. 당초 기획 의도, 콘셉트, 특징, 목표 시장, 독자층 등을 추리합니다. 제목, 목차, 구성, 문체, 디자인 요소 등을 따져 봅니다. 책이 독자에게 전달하려 한 의미와 감각, 곧 센스를 재구성해 봅니다.

 

《라틴어 수업》, 《아픔이 길이 되려면》, 《랩걸》, 《이상한 정상가족》, 《마케터의 일》,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선량한 차별주의자》 같은 책을 읽었다. 이 모임이 아니었다면 대부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은 왜 잘되었을까?' '어떻게 기획한 걸까?'를 묻고 토론했다. 같은 분야의 편집자들과 대화하며 많이 배웠다.

참고자료 만들기

신간을 보다가 제목 및 카피가 인상적인 책, 표지가 인상적인 책이 있으면 온라인 서점의 블로그에 따로 저장했다. 제목을 지어야 할 때, 새로 디자이너를 찾아야 할 때 목록을 자주 참고했다.
표4(뒷표지) 카피는 이 목록에서 확인할 수 없어 따로 스프레드시트를 만들었다. 예컨대 어크로스 신간은 스프레드시트에 제목, 부제, 앞띠지 카피, 표4 카피를 옮겨 적었다. 하다 말다 했다. 오랫동안 꾸준히 했다면 실력이 늘지 않았을까?

꾸준히 공부하기

내가 외서 기획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영어를 어느 정도 읽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교환학생을 가본 적도 없고 대학원에 다닌 적도 없다. 회사를 다니면서 매일 조금씩 원서를 번역하고 영어를 익혔다.
기획 소재도 읽고 공부한 책에서 많이 얻었다. 예컨대 김이경 선생님의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애런델 북스에는 신간이 있긴 하지만 카운터 앞에 단 몇 종만이 진열되어 있는데, 대부분 채트윈 북스의 책이다. 희귀본은 비싸기도 하거니와 내게는 별로 의미가 없어서 무엇을 살까 망설이는데, 마침 편집자가 직접 이 책을 권했다.
글보다 사진이 많아 감정적 직관적으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바랜 것 같은 초록색, 얼굴을 모로 돌린 채 누워 있어서 표정을 알 수 없는 인물이 어우러진 표지에서 알 수 없는 비애감이 느껴졌다. 편집자의 이야기로는 사진 작업을 하는 저자 캔디스 도열이 교도소에 수감된 부모님에게 받은 편지와 불우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자신의 사진과 함께 엮은 책이라고 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서점>, 199쪽.

 

이 책의 제목은 《THIS THING IS ABOUT TO END》이다. 《수영하는 사람들》 같은 좋은 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다.
씨에스루이스의 《오독》에서 매슈 아널드를 알게 되었다. 에세이 'Last Words on Translating Homer'는 원문을 찾아 인쇄도 해 놓았었다. 한국어판으로 나오면 당장 사서 읽을텐데.

못한 일

홍보

나는 내가 만든 책을 손수 알리는 일이 싫었다. 왜 그랬을까? 퇴근 이후의 삶에 업무가 끼어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한 유명 편집자를 보면, 트위터에 자기 신상을 공개하는 계정을 만들고 사담과 직업 이야기를 제한없이 올린다.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책 《도둑맞은 집중력》도 그렇게 해서 트위터에서 화제가 되고 동력을 얻었던 책. 2022년 1월 나도 이 책을 발견해서 기획안을 쓰고 회사에 보고했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만약 내가 이 책의 계약을 따내서 편집했다면, 지금과 같은 성적을 얻었을까? 자신 없다.

제목과 카피

제목과 카피 짓는 능력은 삼 분의 일 정도는 타고나고, 삼 분의 일 정도는 운이고, 삼 분의 일 정도가 노력인 것 같다. 나는 이 능력을 타고나지 못했다. 그러면 노력으로 부족한 부분을 메워야 했다. 이 노력은 단시간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붙들고 늘어지는 근성에 가깝다. 내 경험으로 제목과 카피는 원고를 읽고 또 읽고, 메모하고 또 메모하고, 다른 책의 제목과 카피를 보고 또 보면서 아주 조금씩 나아진다. 나는 근성이 부족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이 정도면 되잖아?'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저자의 팬이 되기

기획자는 두 부류가 있다. 국내서 기획자와 외서 기획자. 나는 외서 기획자가 되고 싶었다. 국내서 기획자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자질인 '팬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편집자로 일하는 동안 저자와 밥을 먹은 적이 한 손가락으로 꼽는다. 가능하면 오후 3시 30분에 커피를 마셨다. 책이 출간되고 저자와의 만남 같은 행사를 퇴근 후 저녁에 참석하는 것도 정말 싫었다. 거의 모든 회사가 이 시간에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근무 시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나가며

정작 편집자로 일하는 동안에는 내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몰랐다. 이직을 다섯 번 하면서, 그중 네 번은 이직할 곳 없이 퇴사했다. 사직서를 내고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서 이직을 준비했다. 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어느 곳을 향했던 것일까, 어떤 편집자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돌아본다. 나는 베스트셀러 기획자가 되고 싶던 것 같다. 《정의란 무엇인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책을 기획하는 외서 기획자. 결국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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